사실 하나.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개그맨이 된 사내가 있다. 데뷔한 다음 해 신인상과 최우수코너상을 수상하고, 이듬 해 연예대상 우수상을 수상한 이 사내는 타 방송사로 이적하자마자 그 해 방송연예대상 남자우수상까지 수상하며 예능인이라면 누구나 탐날 법한 커리어를 손에 쥐게 된다. 사실 둘. 출연하는 프로그램 그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못 웃긴다는 타박을 들으며 퇴출압박에 시달리는 개그맨이 있다. 인터넷에서 이 사내의 이름을 쳐보면 팬까페보다 안티까페가 먼저 뜨고, 게시판마다 이 사내를 퇴출시키라는 의견들이 즐비하다. 사실 셋. 이 둘은 동일인물이다. 예능인의 영고성쇠가 드문 일은 아니기에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 사내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이 사내가 퇴출 위기에 시달리기 시작했기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MBC 방송연예대상 남자우수상을 수상하며 차세대 개그맨으로서의 위상을 떨쳤기 때문이다. 이 사내의 이름은 정형돈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전심전력으로 이 사내를 옹호할 생각이다.


웃길 줄 아는 사람. 웃길 줄 알았던 사람.

사람마다 의견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개그콘서트>에서 정형돈이 간판스타로 활약하며 제법 ‘웃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다들 인정할 것이다. 정형돈이 <개콘>에서 구사하던 개그를 불편해하던 필자도 그가 재능있는 개그맨이라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개콘> 출신 개그맨 중 가장 성공적으로 버라이어티에 적응한 개그맨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것처럼 이경규가 뒤를 봐준다는 지적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활약은 주목할 만 했다. <개콘> 출신 개그맨들이 버라이어티에서 흔히 그러듯 순발력 부족으로 뻣뻣하게 서서 응당 챙겨먹어야 할 자기 몫을 놓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비록 부담스럽고 공격적이었지만 시청자들의 시선을 어떻게 하면 잘 잡아끌 수 있는지 그것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최소한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정형돈이 지금처럼 툭하면 퇴출의 압박에 시달리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정형돈이 현재 출연하는 프로그램들 중 가장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코너는 <무한도전>과 <상상플러스>다. 두 프로그램은 각각 MBC와 KBS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이며,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입담을 자랑하는 예능인들이 포진해있는 프로그램이다. 탁재훈은 몇 번의 포맷 변경을 거쳤던 <상상플러스>에서 흔들리지 않는 쇼의 중심이었고, 유재석은 스스로 ‘유재석식(式) 오합지졸물(物)’ 이란 장르를 개척하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정형돈은 이 당대 최고의 예능인들과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무한도전>에서만큼은,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뒤지지 않았다. 박명수의 호통과 노홍철의 정신없는 재담 속에서 그는 힘으로 승부하고 거만하게 남을 내리 누르며 순간 순간의 재치로 사람들의 약점을 공격했다. 종종 덜 웃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지언정 눈앞에 던져진 기회를 그냥 놓치진 않았다.




잠시 되돌아보자. 그가 초창기에 버라이어티에 출연할 때 그는 게스트라거나 패널로 활약했다. 그가 MBC 나들이를 처음 시작했던 시절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브레인 서바이버’는 수십명이 등장해서 조금씩 자기 몫을 가져가는 스타일의 코너였고, <행복주식회사>는 그렇게 많이 망가져가면서 사람들을 웃기지 않아도 충분히 여유있게 진행이 가능한 포맷이었다. ‘상상원정대’는 매 회마다 그럴싸한 짤방만 만들어내도 욕먹지 않을 수 있었고, <논스톱>은 정통 코메디는 아니었지만 버라이어티처럼 순간의 재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정확하게 합이 짜여진 시트콤이었다. <무한도전>의 전신이라 할 수 있을 ‘무모한 도전’은 힘자랑과 투덜거림만 선보여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코너였지 않았나.


그림자

반면 현재 그가 출연하는 코너 중 가장 욕을 많이 먹고 있는 <무한도전>과 <상상플러스>를 살펴보자. <무한도전>이 초창기 ‘거꾸로 말해요 아하’로 서서히 시청률을 끌어올리던 시절만 해도 그는 날렵하게 공격단어를 던지고, 사람들을 골리며 비아냥거리고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몫을 확실하게 챙겨갔다. 건방지고 재치있는 입담은 노홍철과 공유하는 부분이었지만, 노홍철이 속사포같이 쏟아부어대는 스타일이라면 정형돈은 가만히 한 마디씩 던지는 것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스타일이었다. 때때로 유재석과 박명수를 공격하며 두 사람의 캐릭터를 강화시켜주었고, 새로 들어온 하하를 추켜세우며 보듬었던 것도 정형돈이었다. 그러던 그의 캐릭터가 점차 말이 없어지고 가려지기 시작했던 것은 멤버 여섯 명의 캐릭터과 그 호흡이 조율될 때부터였다. 서로 보완해주지 않아도 각자의 캐릭터가 갈 길이 명확해진 이후, 정형돈은 자신의 캐릭터를 서서히 남들에게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건방지고 안하무인한 것으로는 하하와 박명수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입담의 화려함에서는 유재석과 노홍철에게 밀렸으며, 체력의 우위에서 오는 압도감은 정준하에게 밀렸다. 정형돈은 점점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갔고, 말수조차 적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상상플러스>는 어땠을까? 신정환이 불미스러운 일로 자리를 비우게 되자 대타로 들어왔던 정형돈은 제법 선방했던 편이었다. 탁재훈 – 이휘재 – 신정환의 원년멤버들이 황금호흡을 자랑하며 함께 하던 MC들 - 이병진이나 SIC – 을 조기퇴출시켰던 것에 비하면 정형돈은 그 틈바구니를 제법 잘 파고 들어갔다. 물론 신정환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탁재훈의 짖궂은 농담을 받아주고 문제를 맞추며 어느 정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수행하고 있었다. 비록 특유의 건방지고 무례한 스타일의 개그를 선보일 순 없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셋이 조금만 더 오래 호흡을 맞췄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신정환의 복귀는 빨랐다. 한국에서 연예인들이 ‘공인’의 위치에서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받는 것을 생각했을 때 4개월은 자숙의 기간치곤 너무 짧았다. 황수정이 5년 째 복귀하지 못하고, 이승연이 아직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시달리며, 신동엽조차 재기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걸 생각해보면 신정환은 너무 일찍 컴백했다. 그게 나쁘다거나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른 복귀가 정형돈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탁재훈과는 운명공동체였고 이휘재와는 오랫동안 MC로 호흡을 맞춰왔던 신정환이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금호흡이 재편되었다.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려다가 갑자기 구체제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남겨진 정형돈은 어땠을까? 아무도 노골적으로 그가 웃기지 않는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서서히 낙오되었다. 그리고는 일이 터졌다. 방송 중에 이휘재가 정형돈을 향해 방송에서 해선 안될 욕설에 해당하는 동작을 취한 것이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던 이휘재의 표정과 그 동작은 확대되고 반복되어 인터넷 공간을 떠돌아다녔다. 이휘재는 한동안 해명을 하고 다녀야 했고, 정형돈 역시 이휘재와 절친한 선후배 관계라고 강조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이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정형돈이었다. ‘이휘재가 정형돈보고 웃기지도 못하면서 문제만 맞춘다고 욕했다’라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지면서 사람들의 머릿 속에 ‘정형돈이 좀 못 웃기긴 했지’라는 인식이 노골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욕을 먹은 피해자니만큼 당장의 동정론을 살 순 있었겠지만, 개그맨이 웃기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치명적이니까 말이다.




결국 ‘못 웃기는 사람’으로 낙인찍인 정형돈은 지금 <상상플러스>에서 할 역할이 없어져버렸다. 이휘재는 매번 힌트를 다 듣지도 않은 채 뛰쳐나가 카메라 앞에서 너스레를 떨다가 깔대기 세례를 받고 돌아오고, 탁재훈은 1단계 힌트가 다 제시된 후에 사람들의 머리를 모아 공통점을 파악하다 말고 뛰쳐나갔다가 깔대기를 맞고 돌아온다. 신정환은 만년 꼴등 자리를 도맡아서 하고 있다. 이건 마치 고전 시조가 정해진 운율을 지키며 쓰여지는 것처럼, <상상플러스>가 고집하는 공식과도 같다. 정형돈은? 그는 이 황금호흡 앞에서 자신의 몫을 찾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돌고 있다.

정리해보자. <무한도전>은 여섯 명의 팀웍을 기반으로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뭐든지’ 해치우며 벌이는 리얼리티 쇼다. <상상플러스>는 탁재훈 – 이휘재 – 신정환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우주에서 퀴즈쇼를 빙자해 벌이는 무식의 향연이다. (<상상플러스>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못 맞춰서 웃기는’ 요소를 강조하게 된 건 <무한도전>의 영향도 크다. 그 전에도 그런 모습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명색이 퀴즈쇼인 주제에 ‘이렇게 일찍 맞추면 재미없잖아’라고 대놓고 투덜거리는 건 무식과 이기주의가 판치는 예능프로계의 기린아 <무한도전>이 제자리를 잡고부터였다.) 정형돈은 양쪽 프로그램에서 건방지고 무례한 캐릭터도 상실했고, 특히나 <상상플러스>에선 제대로 된 캐릭터 하나 잡지 못하고 빙빙 겉돌고 있으며, 안 웃긴다는 치명적인 오명을 안고 자신감마저 잃어가는 듯 보인다. (이 부분을 볼드 처리한 이유를 생각해 주기 바란다.) 이 두 프로그램은 더 이상 각자가 정해진 몫을 챙겨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어떻게든 알아서 돋보여야 하는 프로그램이란 소리다. 게다가 날고 기는 재담꾼들이 심할 정도로 많이 모인 프로그램들 아닌가. 정형돈이 어느 정도 자신의 몫을 찾아가고 있는 <느낌표>라거나 ‘동안클럽’과 비교해봤을 때 격차는 더욱 더 커진다.

더 환장할 사실을 얘기해볼까. 이 두 프로그램 <상상플러스>와 <무한도전>은 모두 목요일 녹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물론 <무한도전>은 요즘 멤버들이 투덜대는 것처럼 월화수목금토일을 가리지 않고 무작정 녹화하고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양대 방송사의 간판 예능코너 녹화를 하루에 몰아서 한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양쪽에서 공히 욕을 먹으면서, 양쪽에서 공히 지쳐가는 걸 지켜보는 건 프로그램의 팬 입장에서도, 정형돈의 팬 입장에서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 사내, 어쩌자고 이러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정형돈의 이런 모습들을 가지고 그를 저평가해선 안 된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부각시키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프로그램의 맥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무한도전>을 보자. 난장판을 벌이는 것은 박명수와 정준하, 노홍철이고 수습하는 것은 유재석이다. 막내 하하는 당돌함을 무기로 모두를 공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한도전에서 이 아비규환의 맥을 짚어내는 건 누굴까? 당연히 제작진이다. <무한도전> 제작진들은 여타 프로그램 제작진들과는 다르다. 맥락을 짚어내는 발군의 센스는 물론이거니와, 쇼의 외부에서 이들을 ‘관찰’하고 ‘논평’하는 행위를 통해 제작진 스스로가 하나의 캐릭터를 이루고 있다. 가히 제 7의 멤버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유재석이 날고 기며 쇼를 이끌어 나간다 해도 제작진들이 정확하게 맥락을 짚어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무한도전>은 없다. 그런 제작진들과 가장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는 것은 물론 유재석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맥락을 잘 짚어내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 바로 정형돈이다.

유재석을 제외하면, 박명수와 노홍철의 난장판 속에서 프로그램 전체에 대해 촌평을 날리는 것은 정형돈 뿐이다. 박명수와 정준하의 대화를 보면 이 둘은 서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는 커녕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자신의 말을 반복해서 윽박지르며 서로를 공격하는 유치함과 뻔뻔스러움이 이들의 컨셉 아닌가. 노홍철을 보라. 상대방의 헛점을 파고들어 공격하는 것은 할 줄 알아도 상대방의 말을 받아서 부각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형돈은 이 아수라장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로그램과 한 발 정도 떨어져서 그 순간 순간의 분위기를 읽어낸다. 상대의 말을 받아서 맞받아치고, 강조할 부분을 반복해서 부각시켜주는 것이 누군가. 정형돈이다.




단순하게 웃기는 사람으로만 남을 거라면, 상대의 말을 잘라먹고 들어가도 좋다.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쇼 전체의 흐름을 읽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MC의 위치에 욕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말을 적재적소에 강조해 주는 능력, 쇼 전체에 대해서 맥락에 맞게 촌평을 날리는 능력에서 정형돈은 한참 선배인 박명수나 정준하보다 한 수 위임을 증명하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무한도전>의 자막을 잘 살펴보기를 부탁한다. 정형돈이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말들은 그대로 PD의 한마디로 채용되어 상호 호응한다. 이경규가 정형돈에게 했다던 충고, 혼자 돋보이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으라는 말은 정형돈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이제 정형돈은 자신의 몫을 챙기지 못해 안달내지 않는다. 프로그램 전체를 읽어내며 유재석과 함께 <무한도전>의 호흡을 조율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본인도 자신감을 상실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서브 MC라는 자리는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다. 암울하던 시기 유재석이 겪어야 했던 오랜 암흑기를 생각해보면 그 시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무한도전>처럼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들이 떼로 나와서 단체로 웃기는 프로그램에서 밋밋한 캐릭터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유의 건방진 캐릭터도 잃고, 자신감도 잃어버린 이후의 그의 모습은 그렇게까지 희망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웃기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점을 응용하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근 방영분들을 살펴보자. 정형돈은 하하와의 어색한 사이 덕분에 2회 분의 주연자리를 따냈고, 추석특집을 통해 한 회분의 자리를 더 따냈다. 그 동안 정형돈이 반복되서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단점들을 들춰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남들과 쉽게 어울리고 친해지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내세우며 ‘그래, 나 어중간해’라고 울부짖기 시작했고, ‘그래, 나 안 웃겨’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음 화에선 스스로가 못 웃긴다는 점을 놀림거리로 삼아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가을소풍 특집. 무한백일장을 참조하시라) 제일 최근 화에서 ‘엄마, 나 당분간 또 잘 안 나올 거 같아. 한 두 달 정도 뜸할 거 같은데… 그냥 스펀지랑 번갈아가면서 봐도 될 거 같아’ 라고 말하며 못 웃기는 스스로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다름 아니라 오랜 기간을 숨죽이며 ‘못 웃기는 사람’ 이란 낙인을 안고 살던 박명수가 재기에 성공한 바로 그 방법이다.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를 통해 자신의 절망적인 개그감각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못 웃긴다는 점 자체를 고유의 캐릭터로 구축한 박명수의 전례를 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형돈은 박명수보단 훨씬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가 슬럼프에 시달린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벌써부터 바닥을 치고 재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박명수가 가장 드라마틱한 케이스여서 그렇지, 비단 박명수만 이런 과정을 거쳤던 것이 아니다. 본인이 어느 수준으로 웃긴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예능인의 방송생명을 좌우하는 큰 요소인 것이다. 김국진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 남희석은 사람들을 웃기는데 성공하면 그때마다 ‘나 김국진보다 웃겨?’라고 물어보며 자신의 포지션을 강조했고, 박수홍과 이휘재는 섣불리 사람들을 웃기려 들기보단 무난하게 방송 흐름을 읽는 노선으로 방향을 틀면서 장수하고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정형돈에게 기대를 건다. 게다가 정형돈은 벌써부터 조금씩 프로그램 전체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지 않은가.




가장 최근 방영분인 농촌특집에서 정형돈과 하하는 그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제법 그럴싸하게 진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하 역시 특유의 건방진 캐릭터를 서서히 벗고 <무한도전> 전체의 흐름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괴물 같은 입담을 자랑하는 노홍철처럼 확고한 캐릭터로 승부하기엔 역부족이었지 않나 싶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노홍철처럼 스스로를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캐릭터가 어디 흔한가 말이다. 어찌 보면 폭발적인 웃음을 불러오진 못한다는 점에서 정형돈과 하하는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다만 정형돈의 슬럼프는 눈에 띄이게 길었고 하하는 아직까지는 제 몫을 찾아먹고 있다는 점 정도가 차이일 것이다. 이 둘은 다른 멤버들이 진행석을 비운 사이에 조금은 어색하지만 프로그램이 흘러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정형돈에게 부족한 순발력은 하하가 채우고, 하하에게 부족한 흐름을 읽는 시야는 정형돈이 보강해주면서 두 사람은 MC가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증명해 내는데 작지만 의미있는 성공을 거뒀다.


다시, 정형돈에게 꽃을.

정형돈의 가능성을 믿는가 안 믿는가는 시청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국내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유재석은 10년에 가까운 무명시절을 거쳤다. 그 시절 인터넷이 있었다면 유재석 역시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이경규가 정형돈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여지껏 이경규가 작정하고 키운 사람치고 성공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김용만을 집중적으로 키운 사람이 누군가. 강호동을 예능계로 이끌어 온 것이 누구인가. 박명수가 누구의 수제자를 자처하는가. 윤정수가 MBC에서 안정적으로 방송을 하기 시작한 것이 누구 덕인가. 조형기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기 캐릭터를 굳힌 것이 누구 덕인가. 예능계의 큰 손 이경규 아닌가. 그런 이경규가 주목하고 밀어주고 있는 것이 정형돈이라면 그것은 정형돈의 잠재력을 증명하는 일일 뿐이다. 이경규가 뭐가 아쉬워서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밀어주겠는가 말이다.

첫 문단과 반복이겠지만. 사실 하나.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개그맨이 된 사내가 있다. 데뷔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온갖 상을 휩쓸며 예능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법한 커리어를 손에 넣었다. 자신을 신뢰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소속사와 계약을 맺고 스탠드업 코메디 출신 중 가장 성공적으로 버라이어티로 진출했다. 한국 예능계의 대부의 신뢰를 받으며 지난 2년 간 수많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경험을 쌓아 마침내 A급 게스트가 되었다. 사실 둘. 게시판마다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못 웃긴다는 낙인을 주홍글씨처럼 달고 있는 개그맨이 있다. 슬럼프는 길고 지리하며 이제 방송에서조차 이 사람을 보고 제발 좀 웃겨보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셋.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사내를 지지한다. 이 사내의 이름은 정형돈이다. 내가 그를 믿는 것처럼, 정형돈도 스스로를 믿기 바란다. 그의 행운을 빈다.





출처:Channel Quatre
Posted by 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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