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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13 [펌] 후추 명예의 전당 -김택수편-

'후추'라는 사이트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런지...

아직 제대로된 스포츠 웹진이 얼마 없던 시절에 거의 유일하다 시피한 스포츠웹진의 시초가 되었던 사이트..

그중에서도 '명예의 전당' 코너는 후추 콘텐츠의 백미가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그때 읽었던 주옥같은 글들 중에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것이 '김택수'편 과 '박주봉'편입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도 읽어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출처 : 후추 명예의 전당 (http://www.hoochoo.com)


Prologue


후추 명예의 전당 제20호 헌액자 이호 선수를 인터뷰하러 1년 전에 태릉 선수촌에 갔던 일이 있다. 선수촌 입구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낸 각종목의 대표 선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저녁 외출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참 눈에 익은 선수 한명이 츄리닝 차림으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필자 쪽을 지나쳤다.
김택수였다. 그때 필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약속을 했다. '머지 않은 시간 내에 저 사람을 인터뷰하러 꼭 다시 올 것이다' 라고 말이다. 후추의 명전이 꽤 많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조명하고, '국내'에서도, '비 올림픽 해'에도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각인 시켜가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탁구란 종목이 누락되었었다. 사실 누락될 종목이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 탁구란 종목만큼 '비인기' '인기'의 중간에서 번지수를 헤매던 종목도 없었다. 이미 30여년 전인 1973 '이에리사-정현숙''사라예보 쾌거'로 한반도를 들끓게 했었고, 그 후로도 수많은 대한의 '탁구 귀신'들이 녹색테이블을 수놓았다. 당시 스포츠 언론에서는 탁구에 대한 특집 기사, 기획 기사, 선수 인터뷰 등, 국제 대회 전후로 최소한 반 페이지 이상의 공간을 할애했었다.
'
한국 탁구의 황금기'를 설계하고 건설했던 동아건설의 최모 회장이 서서히 세력을 잃어가던 즈음, 한국 탁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 다시 말해 언론의 초점 역시 '부도 처리'가 되어갔다. 한국 탁구의 설계와 건축까진 좋았는지 몰라도 유지 보수 과정에서는 실패했다. 100년을 내다보고 짓는다는 건축물은, 아니 '한국 탁구 아파트'는 결국 부실 공사가 되어 버렸다.

탁구란 종목의 한 인물을 선정해서 후추 명전에 올리는 일이란… 마치 눈 감고 뺑뺑이 돌려서 아무나 걸리는 한명을 헌액 하더라도 누구도 후추의 선택을 욕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선택의 폭은 넓고 다양했다. 이에리사, 정현숙, 윤길중, 박미희, 이수자, 양영자, 김완, 김기택, 현정화, 안재형-자오즈민, 그리고 유남규… , '소 한 마리 잡으면 버릴 데가 없다'는 축산업자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우리 탁구의 중흥기 및 황금기를 장식한 별들은 누구 한명도 '버릴 데가 없다'. 개개인의 흥미롭고 독특한 스토리가 담겨져 있고 실력으로 따져도… 아니다,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는 발상 자체가 유치하다. 그들 모두 위대한 선수였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후추는 김택수를 선택했다. 김택수가 한국 탁구 사상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16년째 태극 마크를 달고 '고군분투'란 말의 새로운 정의를 내려줬기 때문도 아니고, 일본의 한 탁구 용품 회사에선 '김택수 라켓'이란 제품을 상품화할 정도로 그를 인정해 줘서도 아니다. 후추가 수많은 대한민국의 '탁구 신()' 중에서도 굳이 김택수를 택한 이유는… 그는 우리 팬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회'란 자다가도 벌떡 깰 만큼 지겹도록 들어온 '중국의 벽'을 깨뜨릴 수 있는 '기회'도 아니고, 누굴 만나서 악수하기조차 싫어지는 유럽의 '쉐이크 핸더(Shake Hander)'들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도 아니다. 김택수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현역 생활을 보다 관심 있게 지켜보고 박수와 축하로 그를 떠나보낼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평생 한번도 찾아보지 못한 탁구 경기장을 '김택수 출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번 가 볼 수 있는 그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세계 탁구계의 열손가락 안에 든 'World Class Athlete' 김택수의 경기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
버스는 떠나고 신작로에는 먼지만 뽀얗게 일고 있다'는 아쉬움이 이젠 지겨워서 김택수를 선택한다. 수많은 우리 탁구 영웅 중에 그 누구를 선택해도 무방하다면 (객관성, 주관성을 다 떠나서 얘기해도 무방한 건 사실이다) 후추는 '아직도 늦지 않은' 김택수를 택한다.

가끔 김택수를 TV에서 볼 때 마다 필자는 눈물이 난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두 광대뼈,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유니폼 상의, 속이 허옇게 들여 다 보일 정도로 심해진 부분 탈모 증세, 그리고 두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길고도 허무한 한숨… 하늘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약관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김택수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 어느덧 대표팀의 최고참으로 중국이면 중국, 유럽이면 유럽의 최강 'Number 1 시드 (Seed)'들과 격돌해서 분전하는 김택수의 모습을 보노라면, 솔직한 심정으로 딱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김택수의 취재를 결정하고 나서 필자는 '고군분투'란 말을 다시 한번 사전에서 찾아보게 되었다. '수가 적고 후원이 없는 외로운 군대가, 힘에 겨운 적과 용감하게 싸움. 적은 인원의 힘으로 도움도 받지 않고 힘겨운 일을 그악스럽게 해냄'. 필자가 잘못 알고 있지는 않았다. 김택수와 한 조를 이루고 있는 현역 파트너들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냥 김택수를 보면 '혼자 싸운다'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스웨덴의 발드너에서부터 중국의 류궈량까지… 김택수의 16년 국대 시절동안 맞붙어야 했던 '세계 1'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한 명의 '세계 1'를 겨우 따라 잡을만하면 또 한명의 '세계1'가 왜 그리도 금세 등장하는지, 김택수가 출전하는 승부는 '2-3' 이란 스코어가 왜 그리도 많은지… 세계 탁구계의 '톱 클래스'는 세대교체다 뭐다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허구한 날 '김택수'가 결정을 지어줘야 하는지…'이제 그만 접고 편하게 살아라' 란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누가 붙여줬는지 필자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김택수의 '순둥이'란 별명… 그저 착하기 그지 없고 뽀얗게 생긴 그의 외모만 보고 단정지은 '부당한 별명' 임엔 틀림없다. 깡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런 웃기지도 않는 힘이 솟아나오는지, 그 많은 탁구 전형 중에도 김택수가 '파워 드라이브'를 고집하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는 '순둥이'와는 거리가 멀다. 서양인들과 체력 싸움에서 안 되는 동양인들이라면 '기교파, 두뇌파' 훨씬 더 어울릴텐데, 김택수는 그들과 아주 제대로 맞짱을 떠 왔다. '힘 대 힘', ' 테크닉 대 테크닉'으로 말이다.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그가 보여준 '6시간 투혼의 남북대결'을 누가 잊으리요, 얼마 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보여 준 '32구 환상의 랠리'를 보고도 누가 감히 김택수를 '순둥이'라 하리요… 오히려 김택수의 행동 거지를 살펴보면 '청부 살인자(Hitman)' 쪽에 가깝다. 우리가 보아온 그 어떤 탁구 선수보다도 김택수는 냉철하고 묵묵하고 절제된 행동의 소유자이다. 어지간한 승부처에서도 그는 '쇼맨쉽', '오바'라곤 없다. 현란한 푸트 워크와 어마어마한 궤도와 스피드의 와인드업, 그리고 통렬한 스매싱… 김택수의 '명중' 뒤엔 짤막한 '주먹 불끈' 밖에 찾아볼 수 없다.

'20
세기 최고의 펜홀더', '펜홀더의 교과서' 그리고 '영원한 세계 Top 10' 김택수를 후추 명예의 전당 27호 헌액자라 부른다. '탁구'였더라면 굳이 김택수가 아니더라도 무관했겠지만 후추는 꼭 '탁구의 김택수'만을 고집하고 싶다. 김택수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세계선수권 우승자도 아니지만, 한국 탁구의 자존심을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서 지켜온 외로운 승부사이기 때문에 그를 명전에 초대한다. 김택수마저 은퇴한 다음에 후추가 '뒷북' 쳐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필자는 아마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김택수의 '고군분투'는 이 글로 영원히 날려 보내고 싶다. 앞으로 경기 전 락커룸에서 라켓 고무 커버에 풀칠을 하고 있는 김택수의 머리 속에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란 생각, 그리고 비록 눈에 보이는 '아군'의 숫자는 적을지언정 김택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열렬 후추인'들의 성원의 함성 소리를 잠시라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후추 명예의 전당 안 김택수의 자리는 언제나 빛나게 될 것이다.



'10-10
클럽'

5
14일 발표된 세계 테니스 랭킹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이형택 선수가 당당히 67위에 올라 있었다. 작년 여름, 4대 테니스 그랜드 슬램 중 하나인 US Open에서 이형택이 16강에 진출한 소식은 아직까지도 사실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아니, 어쩌면 있어선 안 될 일이란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테니스란 종목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나 사회적인 저변이 열악한 나라의 특정 선수가 그런 '획기적인 사고'를 자꾸 치다 보면, 혹자는 또 그런 생각을 가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형택이 좀 봐… 인프라가 어떻고 저변이 어떻다 하더라도 열심히 하니까 되잖아? 투자고 뭐고 다 필요 없어. 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이형택의 승승장구는 어찌 보면 세계 탑 랭커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외국 테니스 협회측에 대한 최대의 '부정 행위' 일 것이다. '67 Lee, Hyung Taik - KOR'이라고 쓰여진 랭킹 페이지에 Top 10 랭커들을 한 번 보았다. 쿠에르텐, 사핀, 애거시, 샘프라스, 카펠니코프, 페레로, 휴잇… 등의 쟁쟁한 스타들이 Top 10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형택이 세계 67위에만 올라도 이처럼 광분하는 우리들에게 과연 세계 Top 10 랭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저 '넘을 수 없는 산' 정도의 느낌이랄까? 아니면, '인간이 치는 테니스가 아님' 정도??
같은 날 필자는 세계탁구연맹의 홈페이지인 ITTF.COM을 찾았다. 그리고 현재 세계 랭킹을 검색해 보았다. 1위부터 573위까지의 세계 랭킹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탁구 랭킹도 장난이 아닌데… Top 10만 정하는 게 아니네?' 명예로운(?) 573위의 자리는 몰타 출신의 '부티기에그' 선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테니스의 경우 (공간이 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1,319위까지 랭킹이 정해져 있었지만, 탁구 마저(?) 100등 이하까지의 랭킹을 정한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규모의 탁구 커뮤니티에 감탄했다. 그리고 김택수의 이름을 보았다. '7 Kim, Taek Soo- KOR' 우리가 테니스의 세계 탑 랭커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그런 막연한 부러움과 신기함을 몰타의 '부티기에그' 선수나 그의 팬들도 김택수의 탁구를 바라보며 느끼겠지? 우리 테니스가 세계 랭킹 100위권에 '걸맞은 나라'라면, 탁구 랭킹 100위권에 '걸맞은 나라' 처럼 보여지는 쿠바, 이집트, 싱가폴… 이런 나라의 탁구 팬들은 김택수의 환상의 랠리를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 '코리아의 김택수는 미친 인간이다' 라고들 하겠지. 음하하하…

김택수는 1986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북한을 물리치고 2관왕(단체전, 복식)을 차지하며 한국 탁구계의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한다. 일찌감치 '떡잎'을 알아본 대한탁구협회는 당시 전무했던 '유망주 유학 프로그램'을 가동, 김택수를 1986 9월부터 87 1월까지 유럽 탁구의 본고장 스웨덴 스톡홀름의 벨링비 마을로 보낸다. 수많은 사과나무와 자두나무, 마치 에덴의 동산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보이던 벨링비 마을, 그리고 빙하의 자취가 남아있던 키루나 마을에서 보낸 사춘기 소년 김택수의 스웨덴 조기 유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김택수의 탁구 인생에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그곳 '앵비 탁구 클럽'에서 같이 생활하며 훈련하던 선수들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세계 탁구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불리던 얀 오베 발드너, 페르손, 그리고 에펠그린 등이었다. 이듬해인 87, 그러니까 김택수가 18살 되던 해 그는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자신의 '세계선수권 첫 경험'을 하기 위해 뉴델리로 향한다. '약관 김택수'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같이 연습하던 스웨덴의 발드너 선수와 풀세트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2-3으로 분패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세계 탁구계는 '코리아의 무서운 아이 - 김택수'를 주목하게 된다.

서울에서 열렸던 88 올림픽. 대표팀 막내 김택수는 1년 선배 유남규의 '금메달 돌풍'에 철저히 밀려난다.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김완, 김기택과 같은 선배들을 실력으로 물리친 바 있었던 김택수지만, '민족의 향연' 88 올림픽에서 만큼은 실력과는 무관한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표팀 엔트리에 올라 있었지만, 88올림픽은 결코 김택수의 몫이 아니었다. 안방에서 열렸던 올림픽에서의 '들러리 신세'를 뒤로 하고 8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유로-아시아 대회에서 김택수는 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을 경험한다. 대회에 출전했던 각국의 선수 중에 최연소의 나이로 팀 선배 김기택 선수를 3-1로 물리치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김택수의 시대는 그렇게 막이 오른다.

89
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에서 김택수는 유남규와 한 조를 이루어 동메달을 따냄으로써 중국을 5-0으로 완파하며 '쉐이크 핸드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스웨덴에게 '펜홀더의 자존심'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90년 북경아시안 게임 남자 단체전… 국민들의 가슴 속에 김...란 이름 석자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북한과의 피 말리는 일대 전쟁. 이 대회를 통해 김택수는 명실공히 한국 탁구의 대들보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정상의 자리에서 정확히 10년을 버텨왔다. 87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이후, 김택수는 무려 8번의 세계 선수권 대회(격년제)에 출전했고, 4번의 올림픽과 3번의 아시안 게임에 나가서 김택수 특유의 힘과 투혼을 발휘한다. 비록 이에리사, 유남규, 현정화처럼 세계 선수권이나 올림픽 금메달 사냥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유독 김택수에겐 '뒷심 부족'이란 말도 심심찮게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김택수는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한국 탁구의 간판으로 군림해 왔다.

김택수는 말한다. 하루이틀 만에 우승여부가 판가름 나는 단기전에선 세계 그 어떤 탑 랭커들과 맞붙어도 이길 자신 있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선이 굵고 체력 소모가 심한 파워 위주의 탁구가 워낙 사람 진을 빼 놓아서 그렇지, 반나절 동안 2-3명 꺾고 우승하는 대회엔 언제 나가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이다. 그의 말은 ''이 아니었다. 지난 91년 일본에서 열렸던 IOC 회장컵 ('사마란치 컵') 세계 8강 초청경기에서 김택수는 그야말로 펄펄 난다. 세계 8위 안에 드는 중국, 유럽 권의 최강자들을 상대로 한명씩 아주 개박살을 내며 결국 결승에서도 발드너를 가볍게 3-1로 따돌린다. 92년부터 출전했던 '월드 올스타 서킷', 이 역시 세계 탑 랭커들을 초청해 세계 전역을 순회하며 1, 2, 3차 우승자를 가린 후 최종 우승자를 결정하는 단기전 성격의 승부. 이 대회에서도 역시 김택수는 지난 10여년 동안 통산 9번의 우승을 차지한다. 우리가 '모르는 세계 대회', 우리가 '안 본 세계 대회'에서 김택수의 진가는 나타난다. 우리보다 외국 탁구팬들이 김택수를 더 인정하고 감사해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10-10
클럽'… 야구에는 '30-30 클럽', 그리고 축구에도 '50-50 클럽'이 생겨나는 판국에 왜 탁구에는 '10-10 클럽' 이란 말이 생기지 않는 건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10-10 클럽'이 뭐냐고? '10년 동안 세계 10'의 자리를 지켜온 실력, 꾸준함, 그리고 체력의 결정체를 뜻한다. 탁구에는 왜 그런 눈에 확 들어오는 용어 하나 만들면 안되나… 필자의 친한 친구는 한국 탁구를 보면서 종종 그런 말을 했다. '김택수가 아무리 잘 해도 빅 게임에선 유남규가 나가야 된다'고 말이다. 아시안 게임이다 올림픽이다… 소위 'TV 중계 되는 큰 대회'에선 유남규가 죄다 쓸었으니 전혀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김택수의 끈질긴 생명력을 간과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소위 '빅게임에 강하다는 그들' 모두가 떠난 이 자리에도 김택수만은 남아있다. 발드너다 왕따오다 유남규다… 그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도 김택수만은 아직도 라켓을 쥐고 있다. 10년을 세계 탑 클래스에 속해 있다는 사실… , 절정의 실력을 꾸준히 유지하는 선수의 진정한 가치를 필자가 아무리 목 터져라 외쳐 봐도, 칼 립켄 주니어 혹은 최태원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소귀에 경읽기' 밖에 안 된다. 김택수의 질긴 생명력과 자기 관리… 어쩌면 그를 칭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에 가장 으뜸으로 꼽아야 할 '김택수만의 저력' 일 것이다.



'The Vintage
김택수' ('90 & '98 아시안 게임 Replay)

1990
년 북경 아시안 게임은 김택수 본인에게는 물론, 유남규란 '올림픽 스타'에게만 의존하던 당시 한국 남자 탁구계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북한과 맞붙은 한국은 유남규의 뜻하지 않은 부진에도 불구하고 김택수의 3전 전승, 그리고 복병 박지현의 2승에 힘입어 종합 전적 54패로 북한을 간신히 따돌리고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수비 탁구의 귀재'라고 불리던 북한의 이근상, 유남규를 꺾고 졸도까지 한 김성희, 그리고 약관 18세의 '겁없는 아이' 최경섭을 차례로 물리치고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택수의 마지막 경기는 1 1구에 온 국민의 손에 땀을 쥐게 하고도 남았다. 한국 시간으로 밤 8, 북경의 노동자 체육관에서 시작된 북한과의 단체전 결승은 새벽 1시가 넘어서 끝이 났고 김택수는 마지막 세트까지 피를 말리는 접전 끝에 최경섭을 2-1로 제치고 영웅이 되었다. 최경섭과의 마지막 9차전… 후추가 Replay 한다.

90
북경 아시안 게임 남자 탁구 단체전 결승 : 김택수 (한국) vs 최경섭 (북한) 단체전 스코어 3-4로 궁지에 몰렸던 한국 남자팀은 이근상을 2:0으로 이긴 박지현의 수훈에 힘입어 전체 스코어 4:4… 김택수의 '마지막 한판'으로 희비가 엇갈리게 되어 있었다. 김택수는 이날 이미 2경기에 출전, 이근상과 김성희를 각각 2-0으로 셧아웃 시킬 정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김택수와 격돌하는 최경섭은 18살의 나이로 '무서울 게 없는' 다혈질 쉐이크 핸더였다. 1세트… 국제 무대 경험이 비교적 부족한 최경섭을 압도하기 위해 김택수는 초반부터 파워 넘치는 드라이브와 속공 스매싱으로 최를 몰아 부치기 시작한다. 17-7까지 앞서 나가는 김택수의 일방적인 리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택수의 '약점'은 초반 상승세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저하되고 '뒷심 부족'을 이유로 역전패를 곧잘 당하곤 했는데, 1세트를 여유롭게 리드해 나가는 김택수에 대한 유일한 우려는 '막판 뒤집기' 밖에 없을 정도로 초반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김택수의 맹공에 기가 꺾인 최경섭은 연속되는 서브 리시브 실수로 쉬운 점수를 내주며 1세트를 21-13 란 점수로 패한다.

각오를 새롭게 한 최경섭은 2세트 시작과 함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전법으로 초반부터 엄청난 공격을 시도한다. 기회만 생겼다 하면 무조건 파워 넘치는 드라이브 공격, 김택수는 당황한다. 초반 0-7까지 리드를 당하던 김택수는 기가 오른 최경섭의 멘탈 게임에 교란되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1세트를 넘겨준 최경섭의 반격에 체육관을 찾은 중국 관중들가지 '최경섭'을 외치며 일방적인 응원이 시작된다. 1, 2 포인트 따라간다 싶으면 최경섭의 과감한 속공에 무릎을 꿇은 김택수는 15-21 2세트를 내준다. 1세트와는 판이하게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지막 3세트… '물불을 가리지 않는 최경섭의 총력전' 3세트 초반에도 주효, 0-5까지 점수차를 벌인다. 그렇지 않아도 2세트의 '원 사이드'한 승리에 제대로 힘을 받은 최경섭은 3세트 초반마저 자신의 페이스 대로 경기가 풀리자, 완전히 자신감을 얻은 모습… 한국 측 벤치는 초조와 긴장 속에 침통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해설자마저 이미 경기를 포기한 듯, "아쉽다'는 말만 반복한다. 경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 정도로 북한의 최경섭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3세트 스코어 1-8… 패색은 짙었다.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최경섭은 기쁨에 길길이 날뛰었고 앳된 모습의 김택수는 코 앞에까지 왔다가 멀어져 가는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때…
김택수의 일대 반전은 시작된다. 피 말리는 롱 랠리 한방으로 4-9로 점수 차를 좁히더니 그 후 다섯 점을 연속 득점… 마치,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김택수는 최경섭의 헛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김택수의 반격에 당황한 최경섭은 실수를 연발했고 점수는 어느덧 9-9 동점… 이때부터 김택수와 최경섭의 숨막히는 각축전은 시작된다. 김택수가 14-10 까지 치고 나가면 곧바로 최경섭은 따라 붙었고, 14-12, 14-13, 14-14, 15-15… 양 선수는 경기 도중 룰에도 없는 타임을 불러 라켓을 놓고 땀을 닦으려 하지만 심판 아저씨가 브레이크… 결국 두 선수는 '갈 데까지' 간다.
19-16
상황에서 김택수와 최경섭은 다시 한번 총력을 다한 랠리를 펼친다. 김택수 승리… 승부의 쐐기를 박는다. 이 포인트를 진 최경섭은 격분해서 라켓을 집어 던지고 김택수는 특유의 '주먹 불끈'…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다. 탈진 상태까지 간 두 선수는 20-19까지 승부를 몰고 가지만 김택수는 21-19 란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을 한국팀에 안겨준다. 김택수의 3승 째가 결정되는 순간, 한국 벤치 인사불성 북한 벤치 망연자실… 마지막 9차전을 앞두고 "만약 한국팀이 진다면 나 때문에 진 것이다" 라고 얘기했던 유남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연출한 김택수와 얼싸안고 깡충깡충… 김택수의 아시안 게임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98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결승전: 김택수 (한국) vs 류궈량 (중국)
필자가 기억하는 많지 않은 '탁구 명장면' 중에 하나가 바로 김택수와 중국의 류궈량이 펼쳤던 98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 결승에서의 '32구 랠리' 일 것이다. 그 장면을 하일라이트로 보면서 넋을 잃었다. '저게 대체 사람인가?' 중국의 세계 1, 2위 공링후이와 류궈량을 차례로 꺾고 8년 만에 다시 한번 아시안 게임 정상에 오른 김택수의 분전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김택수 탁구의 모든 것이 아마도 이 한 포인트에 축약되어 있을 것이다.



김택수와 사람들…


지난 15년 동안 김택수를 '거쳐간' 세계 정상의 탁구인들의 명단을 뽑아보면 꽤나 쟁쟁한 이름들이 속해 있을 것이다. 필자가 굳이 '거쳐간' 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세월이 흐르고 탁구판이 변해도 'Kim, TaekSoo - KOR' 란 사실만큼은 아직까지도 '불변'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절에 '친구 따라서' 라켓을 처음 잡은 김택수가 처음으로 맞붙었던 세계 최강 발드너에서부터 왕리친까지… 김택수의 라이벌은 '씨가 마르지 않는 것' 같다. 아직도 중국집에서 짜장면은 먹지 않는다는 김택수의 말 한마디가 중국에 대한 김택수의 모든 걸 대변해 준다. 제 아무리 중국의 '인해전술'이 무시무시하다곤 하지만, 중국의 탁구 문화는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이렇게까지 재빠른 세대교체를 단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2년마다 열리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같은 이름의 중국 선수가 결승전에 오르는 일이 없으니… 김택수 혼자서 제 아무리 짱구를 굴려서 묘수를 던져도 '역부족'이란 말이 실감난다. 유럽은 또 어떤가? 경기 후 진심으로 그 친구들하고 악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까 싶다. 이러다가 김택수는 악수 대신 '하이파이브' 던져 대는 결례를 범하는 인간이 되는 건 아닌가…
김택수의 탁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획을 그었던 3명의 선수를 집중 조명해 본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김택수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라이벌 관계는 서로의 최고를 뽑아낸다'는 말처럼 말이다.

얀 오베 발드너 (Jan Ove Waldner)
스포츠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발드너란 이름 석자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1965 10 3일 스웨덴 스톡홀름 출생의 자타가 인정하는 현재 탁구 사상 최고의 선수 발드너…
지난 20여년 간 중국이 넘쳐 나는 '탁구 인재'들로 세계 탁구계의 한 축을 지켜나가고 있었다면, 나머지 한 축은 아마도 발드너의 오른손 하나로 지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장 179Cm, 체중 76kg의 잘 뻗은 몸매와 수려한 외모로 세계 각지에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발드너는 아마도 스웨덴이 배출한 최고의 '수출 상품'일 것이다. 89 6월 생애 첫 세계 랭킹 1위 자리에 등극해서 그 후 93년까지 매년 랭킹 1위의 자리에 올랐던 발드너는 유럽 탁구의 아성이었다.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한국 나이 36살의 나이로 '확실한 하향세로 접어들었다'던 발드너가 개인 단식 은메달을 획득한 사실은 그의 화려한 탁구 인생에 확고부동한 느낌표를 찍은 셈이 되었을 것이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식 금메달, 세계선수권 대회 통산 3관왕, 유럽 선수권 2관왕, ITTF 프로 투어 2관왕 등 중국 선수와 발드너가 맞붙었던 '결승전'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발드너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아마도 세계 각지의 언론에서 예외 없이 대서특필하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일 것이다. "XXX, 발드너 격파!' 지난 20여년간 탁구 정상을 꿈꾸던 수많은 탁구 유망주들에게 발드너를 꺾는 일이란 '파란'이자 '성공 보증수표'처럼 느껴졌다. 김택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드너와 김택수… 김택수와 발드너의 인연은 그 어떤 국내 탁구 선수들의 그것과도 다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택수는 국내 선수로는 유일하게 고등학교 시절 발드너의 '안방'인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탁구 연수'를 다녀왔던 선수이다. 5살 연상의 발드너는 동양에서 온 앳된 모습의 김택수를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6개월간 함께 생활하며 훈련하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유독 해외에서 강하다는 김택수, 그리고 유난히 유럽선수에 강하다는 김택수에게는 모름지기 고등학교 시절 경험했던 유럽 탁구가 아직까지도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발드너와의 첫 대결은 김택수의 세계선수권 데뷔 무대였던 87년 뉴델리… 개인단식 2회전에서 격돌한 김택수는 5세트까지 가는 혈전을 벌이며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비록 진 승부였지만, 이 대회를 계기로 세계 탁구계는 한국의 신예 김택수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후 4년이란 세월이 지난 91년 사마란치컵 세계 최강전 결승전에서 김택수 역시 처음으로 '김택수, 발드너 격파'란 꿀맛을 보게 된다. 발드너의 손에 의해 치러진 김택수의 데뷔전 그리고 그후… 김택수와 발드너는 각종 크고 작은 국제 대회에서 통산 20여 차례 다시 격돌한다. 김택수의 증언(?)에 따르면 발드너 상대로 승률이 40% 정도 된다고 하니 대충 감이 온다. 발트해의 바이킹 후손답게 시종일관 무표정하고 프로페셔날한 모습의 소유자인 발드너가 사석에서는 그렇게 장난기가 많고 사교성 풍부한 선수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장난꾸러기'란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고 하는 발드너는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김택수와 함께 해 온 '바다 건너 유럽'의 진정한 친구이자 라이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따오
필자가 백수십장이 넘는 김택수의 과거 자료를 뒤지면서 혀를 내둘렀던 점은 바로 중국의 끊임 없는 '스타 탄생'이다. 어쩜 그렇게 줄기차게 세계 탑 랭커들을 배출해 내는 건지… 96 애틀란타 금메달리스트 류궈량,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공링후이, 2001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왕리친 그리고 왕따오… 모두 한때는 세계 1위 랭킹에 올랐던 선수들이고, 현재 무서운 신예로 떠오르는 마린은 이제 겨우 21살이다. 중국 본토에 등록된 탁구 선수가 총 7백만 명이라고 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택수 본인의 말대로 최근 몇 년간 세계 1, 2위를 독식하던 공링후이와 류궈량과의 상대 전적은 각각 22, 31패로 대등한 성적을 올렸다. 서서히 그들을 물리칠 해법을 찾아나간다는 얘기다. 몇 차례의 격돌 끝에 세게 최강 격파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듯 싶으면 그땐 이미 새로운 중국의 강자가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는 얘기다. 왕리친과 마린이 그런 경우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일 것이다. 김택수가 지난 10여년 간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6번의 세계선수권대회는 중국의 신진 스타의 등용문과도 같았다. 2년마다 새로운 스타가 발굴된다는 얘기다. 한국? 지난 10여년 동안 꾸준하게 그나마 세계 Top 10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선수는 김택수 뿐이다. 이런 걸 보고 중국의 '인해전술'이라고 해야 하나…

그토톡 몸서리 쳐지는 중국 선수들 중에 유독 김택수의 뇌리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 이름 석자가 있다. 바로 왕따오… 공링후이나 류궈량에 비해 국제적인 업적이나 지속적인 월드 랭킹에서는 뒤떨어질 지도 모르겠지만 김택수 개인에게 왕따오란 이름은 그 어떤 중국 선수보다도 특별하다. 167cm의 단신에 배까지 나와 운동선수로 보기 어려운 체격이지만, 쉐이크 핸드 전형을 중국식으로 완성시켜 펜홀더 전형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선수들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던 선수였다. 힘과 스피드, 유연성의 3박자를 겸비하고, 테이블에 바짝 달라붙어 날리는 타점 높은 드라이브와 까다로운 구질의이면 돌출 러버 사용에 능해 95-96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선수였다.

김택수 역시 탁구에 서서히 눈을 뜨려던 시절인 1995 5. 중국 텐진에서 개최되었던 제 43회 세계선수권대회… 김택수는 파죽의 연승 행진을 기록하며 8강에서 격돌한 왕따오를 불과 30분 만에 3-0으로 셧아웃 시켜버렸다. 대회 기간 내내 워낙 컨디션이 좋았던 김택수는 4강전 상대자 류궈량과의 한판 승부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믿기지 않는 왕따오와의 '악연'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적진의 심장부에서 중국 탁구의 영웅 왕따오를 개박살 낸 그날 밤, 국제탁구연맹(ITTF)은 긴급 집행위원회와 소청위원회를 열고 '한국의 김택수가 중국의 왕따오와의 8강전에서 사용한 라켓에 ITTF가 허용한 기준치 이상의 유해화학물질이 함유된 고무풀(본드)을 쓴 것으로 밝혀져 실격처리 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오전 왕용강과의 16강전에서도 같은 라켓을 사용했는데 아무런 문제제기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유독 왕따오 전 이후에 이런 판명을 내린 점은 의심이 가고도 남았다. 원래 탁구 선수들은 라켓과 러버를 경기에 앞서 매번 다시 붙이게 되는데 이는 접촉 강도가 강해질수록 공의 탄력과 스피드가 크게 향상 되기 때문에, 한번 사용해 약해진 라켓의 접촉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경기 시작 약 1시간 전에 고무풀로 러버를 새로 부착한다. ITTF 말하는 '유해성 화학물질'이란 얼마 전까지 동네 불량 청소년들이 집단으로 들이 마시던 그 본드 안에 들어있는 환각성 솔벤트를 말한다. ITTF는 이를 방지하고자 일정기준치를 정한 본드제품만을 인정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12개사 제품이 공인되어 있다. 김택수의 당시 라켓은 공인 업체인 일본의 버터플라이사에서 만든 페어젝과 독일의 실라 미케 제품을 혼합해서 사용해 왔는데, 유독 왕따오와의 경기 후만 그렇게 강한 유해성분이 검출됐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중국 탁구계의 비리와 '져 주기' 행위를 고려했을 때 이번 사건은 충분히 중국측의 텃세 내지는 '작업'이 가미된 결과라고 김택수 측은 입장을 밝혔다. 문제의 핵심이 김택수의 양심이건 제조사의 실수였건 간에 김택수는 탁구계 사상 처음으로 고무풀 때문에 실격 당하는 불명예를 경험하게 된다. 평소 정직과 성실하기로 국내외 탁구계에 소문났던 김택수의 탁구 커리어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 김택수를 더욱 슬프고 무기력하게 만든 건 대한탁구협회 측의 반응이었다. 제대로 된 규명 파악 또는 항의 한번 못 해 보고 ITTF 측의 판정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며 귀국한 김택수에게 오히려 '엄중 경고' '미지근한' 징계를 내렸다. '선수 자격 박탈'이면 박탈이고 '출장 정지'면 정지지, '엄중 경고'는 또 무슨 대단한 '징계'인지… 협회측도 답이 안 나왔다는 얘기 밖에 안 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택수는 꼬박 이틀을 통곡했다. ITTF의 결정이 억울하고 중국 측의 텃세가 분하고 대한탁구협회의 반응이 섭섭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탁구 라켓을 놓을 생각까지 한다. '국제적으로 아무런 힘 없는 한국 탁구 환경에서 더 이상 죽어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회의가 들어서 였다. 하지만, 김택수는 '실력 하나로 다시 한번 니 결백을 밝혀라'는 주위 선배들이나 동료들의 위로와 격려를 등에 업고 한 달 뒤 다시 탁구 계에 복귀, 홍콩에서 벌어진 95 탁구월드올스타 서킷에서 왕따오를 다시 한번 3-0으로 셧아웃 시킨다. 고무풀 논란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왕따오 그리고 '고무풀 사건'은 김택수의 탁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반환점이 되기도 한다. 시련의 나날을 보내며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되고 안정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96년부터 김택수의 탁구는 '완전히 물이 올랐다'는 주위의 평을 듣기 시작하고 앞서 말했던 공링후이, 류궈량과의 역대 전적에서도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유남규
김택수의 명전을 쓰는 데에 있어서 '한국 남자 탁구의 간판', '싸움닭', '불사조' 유남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유남규가 후추 명전의 앞마당에 올라와 있어도 그 누구 하나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김택수를 선택한 후추의 결정을 반신반의하는 사람은 있어도 유남규를 선택했을 때 그 결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후추는 김택수를 선정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말이다. 지난해 1, 유남규의 태극마크 반납을 두고 기타언론에서 사용했던 유남규의 프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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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남중 재학 시절이던 지난 85년 청소년대표로 처음 태극마크를 단 유남규는 왼손 펜홀드 드라이브의 정통공격법을 트레이드마크로 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단식과 단체전 우승으로 대회 MVP가 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88년 서울올림픽서는 구기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딴데 이어 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현정화와 컴비를 이뤄 혼합복식 우승을 일궈냈고 90년 북경아시안게임서는 한국의 단체전 우승에 주역을 맡았던 한국탁구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렇다. 유남규는 말 그대로 한국 남자 탁구의 '얼굴'로 인식되어왔다.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당시 유남규가 전해줬던 그 환희와 감격의 순간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예선전에서는 대충대충 어슬렁 거리다가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더 빛을 발했다는 유남규, TV 중계 되는 대회에서는 꼭 실력 이상의 기량을 발휘해 한국 탁구의 인기몰이에 절실히 필요했던 'TV용 탁구선수' 유남규, '녹색 테이블의 여우'라고 불릴 정도로 잔꾀가 뛰어나 상대방의 단점을 이용하는 두뇌플레이에 있어서는 세계 그 어떤 선수도 따라갈 수 없다는 평을 받던 유남규… 유남규의 쇼맨쉽 그리고 카리스마 때문에 그의 진정한 탁구 실력이 폄하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죽여주는 탁구선수'였다.

김택수는 현역 시절 전반부 7-8여년을 '유남규의 그늘'에 묻혀 살아온 적도 있었다. 다른 것 다 제쳐 놓고라도, 10여년간 두 사람이 복식 파트너로 뛰던 시절 내내 그 '환상의 복식조'는 항상, 그리고 영원히 '유남규-김택수 조'라고 기억되어왔다. 단 한번도 '김택수-유남규 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유남규는 한국 탁구를 견인해 왔던 선수였다. 그들이 지난 89 3월 제40회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처음으로 복식 파트너로 기용되던 시점부터 이 두 젊은이들은 평생을 잊지 못 하는 선의의 경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유남규 같은 파트너와 경쟁자가 있어서 김택수는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할 수 있었고, 김택수 같은 다크호스가 항상 고삐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유남규 역시 '올림픽 신화'에 안주할 수 없었다. 유남규와 김택수, 김택수와 유남규… 둘은 마치 '물과 기름'이었다. 하지만 이 두 명의 한국 탁구의 보배가 손을 잡고 녹색테이블을 달굴 때면, 그들을 지켜보던 모두가 '무아지경'으로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런 결합을 두고 '조화'란 말을 조심스레 쓰리라 본다. 왼손과 오른손의 조화, 영호남의 조화, 동아생명과 대우증권의 조화, 기교와 파워의 조화, 그리고 화려함과 절제의 조화… 두 살 터울의 나이만 빼놓고 보면 절대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이 두 사람이 펼쳐내는 환상의 탁구쇼를 보면서… 분명 사람들끼리의 '궁합' 존재하는 것 같다.

89
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 대회에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김-유 커플, -김 커플은 곧 바로 동메달을 획득하며 그 후 각종 국제대회에서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93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 동메달, 99년 네덜란드 세계선수권 동메달,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동메달, 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동메달 등, 비록 세계 정상에 올라보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유-김 복식조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평도 없지 않았다. 단식 라이벌로선 90년대 중반 이후 유남규에게 절대적인 우세를 나타낸 김택수는 각종 크고 작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하향곡선을 긋던 유남규가 지난 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때 '후보 신세'에 불만을 품고 조기 귀국, 실질적인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두 거물의 라이벌 구도는 막을 내리게 된다.



세계 속의 김택수

우리나라의 '비인기 종목' 선수들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보다 바다 건너 타지에서 훨씬 더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는 느낌이다. 김택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양의 탁구 강국을 순방할 때면 어딜 가든지 김택수는 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려야 한다. 탁구 선수가 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려? 이해가 안 된다. 프로 야구 선수도 아니고 프로 농구 선수도 아닌 탁구 세계 탑랭커한테 사인을 받아? 대만의 한 팬은 대만에서 열렸던 한 국제 대회의 현지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도중 TV 화면에 나온 김택수의 얼굴을 다시 카메라로 찍어 김택수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김택수의 집에서 보았던 수백장의 사진 속엔 적지 않은 수의 중국 여성 팬들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들 때문에 부인 김조순의 바가지도 피해갈 수 없었다. 현 여자 탁구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왕란 선수의 취미 생활에 대한 일화를 들어보면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택수가 한창 펄펄 날기 시작했던 95, 그러니까 왕란 선수가 학생시절부터 그녀는 틈만 나면 김택수의 경기 장면 비디오를 시청하면서 '여가 선용'을 한다. 대부분의 신예 중국 선수들의 '탁구 히어로'는 발드너와 김택수로 꼽힌다고 하니 기뻐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김택수에 대한 대외적인 관심은 동양권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유럽 최강의 프로 탁구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명문 탁구클럽 '그랜저우' 팀은 지난 97 5월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에 어깨부상으로 남자단식 32강전에서 탈락한 김택수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러브콜을 보내왔다. 10개월 임대 형식으로 연봉 15만 달러라는, 당시 탁구 선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거래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랜저우' 클럽은 삼소노프, 공링후이, 류궈량 등, 대부분 당시 세계 랭킹 10위 권에 속해 있던 탑 클래스 선수들을 보유하고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던 강팀이었고, 김택수까지 영입해서 '펜홀더 전형'까지 보강하려는 의도였다. 소속팀 대우증권 역시 팀의 기둥이었던 김택수를 '좀 더 큰 무대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며 기량을 향상시킨다'는 취지에는 동감했지만, 여러 가지 민감한 팀 사정 때문에 결렬되고 말았다. 유럽 측의 끈질긴 '김택수 스카우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98 9월에는 프랑스의 1부리그 클럽인Caen(까엥)에서 10개월 임대 조건으로 15천만원을 제시했다. 98 10월부터 99 5월까지 까엥 팀 소속으로 탁구를 좀 쳐달라는 얘기였고, 그 기간 동안 국가대표 소속팀 복귀에 대한 규제는 전혀 없었다. 태극마크는 언제라도 달게 해 줄 테니 '비는 시간'에 와서 라켓 좀 잡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결국 김택수는 10여년 만에 다시 한번 유럽으로 복귀한다.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까엥에 적을 두었던 기간 동안 김택수는 아마도 일생일대 가장 감정적으로 up 되어 있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진출 2개월 뒤인 98 12월엔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의 기적적인 금메달 잔치가 있었고 그의 천년배필 김조순과의 교제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도 역시 그가 프랑스 까엥 소속으로 운동을 했을 때니까 말이다.

김택수의 길지 않은 일대를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필자는 한 가지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의 스포츠 영웅 타이거 우즈, 안드레 아가시, 마이클 조던 등이 세게 스포츠 마케팅의 시장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선수였다면, 김택수 또한 '우리가 모르는 동안' 세계적인 탁구 용품사의 간판 얼굴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의 버터플라이 사는 스웨덴의 '발드너 시리즈', '페르손 시리즈',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프리모락 시리즈'에 이어 얼마 전 펜홀더 전형 전용 라켓인 '김택수 시리즈'를 출시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현존하는 세계 시장의 탁구 라켓 중에 가장 비싼 제품 중에 하나라고 한다. 다시 한번 굳이 탁구를(Table Tennis)를 테니스(Tennis)에 비유한다면, 김택수의 지속적인 세계 랭킹을 토대로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질 수도 있으나, 국내 그 어떤 선수가 자기 이름을 건 라켓이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단 말인가… 몰타의 탁구 팬들이 들으면 '경기'할 소리가 아니란 말인가…



김택수의 '사는 이야기' & 연금 '만땅' 커플

김택수의 명전 취재는 이례적으로 2번의 인터뷰가 필요했다. 철저한 '탁구 이야기' 듣기 위해 소속팀 담배인삼공사의 훈련장인 상무 체육관으로 한 번 갔었고, 김택수의 '사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송파 보금자리를 찾았다. 원래는 김택수와 소주를 한잔 하려고 했었다. 상무체육관에서 김택수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 왠지 모르게 ' 사람 술 한잔 들어가면 진짜 재미있는 사림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 약속을 했지만, 그가 급하게 지방 대회에 출전하는 바람에 소주 약속은 무산되고 그의 신혼살림 집을 대신 찾았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김택수의 반려자는 바로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김조순이다. 사실, 필자의 성격이 고약해서인지 '김택수-김조순' 정도의 스타 커플이라면 무엇보다도 '연금'이 궁금했었다. 둘이 합쳐서 도대체 얼마나 받는지 말이다. ^^ 이미 김택수의 1차 인터뷰를 통해 연금에 대한 이야기를 명확히 들었기 때문에 그의 집을 찾았을 땐 그냥 아주 거침 없이 '연금 커플'이란 표현을 쓸 수 있었다. 이에 받아 치는 김조순의 멘트가 더 압권이다. "우리 연금 '만땅' 커플이예요… ^^

김택수와 김조순은 98 6, 태릉 선수촌 합숙 때 처음 만나게 되었다. 대표팀 선수들의 최대 악몽 중에 하나였던 '불암산 합동 등반' 당시 두 사람은 모두 부상 때문에 '도보조'에 속해 있었고, 하산길에 우연히 동행을 하게 된 김택수와 김조순은 '불꽃이 찌링찌링' 하는 그런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둘의 첫 만남은 하여튼 그렇게 이루어졌다. 내려오는 길에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둘 다 잘 기억은 못한다. 하지만 (필자 역시 그를 만나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김택수 특유의 '입담'에 김조순은 호감이 갔던 것 만큼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저 친한 '운동 선후배' 사이였지만, 같은해 12월 방콕 아시안 게임에 두 사람 모두 '동반 우승'을 하면서 둘의 사이는 좀 더 끈끈해 진다. 전화, 편지, 삐삐를 통해 서로 격려하며 응원하고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 보다도 상대방의 금메달 소식에 더 감격한 걸 보면 제 아무리 선후배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사건'은 터졌던 것이다.

이제 막 불꽃을 당기려던 두 사람에게 시련도 없지 않았다. 2000년 봄, 좀 더 홀가분한 상태에서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결혼 계획을 발표했던 두 사람에게 집중되는 언론의 관심 그리고 인터뷰 요청으로 인해 먼저 나가 떨어진 사람은 바로 김조순이었다. 극도의 집중력과 심적 평정을 요구하는 양궁 선수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결과는 시드니 올림픽 예선 탈락. 김조순의 올림픽 2관왕 꿈은 그렇게 무너졌고 김조순의 충격으로 인해 김택수 역시 올림픽 본선 무대에서 흔들렸다.
단식 1회전 탈락, 복식 8강 탈락… 잘 나가던 스타 커플이 꿈꾸던 최대의 결혼 선물,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명예로운 은퇴'는 그렇게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함께 위로하며 극복했던 것이 오히려 둘의 사이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2000 1223일 올림픽 파크텔 결혼식장에서 둘은 황영조의 사회로, 그리고 김운용 회장의 주례로 화촉을 밝힌다.

김택수와 김조순은 아주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매달 꼬박꼬박 200만원씩의 수입이 보장되니 사는 게 재미없을 일도 없겠지만… 송파에 자리한 그들의 보금자리는 말 그대로 깨소금이 쏟아질 것만 같은 여느 신혼살림과 다를 바 없었다. 김택수와 5년 차이가 나는 김조순 역시 이제 아줌마 냄새가 폴폴 나서 그런지, 운동 선수 특유의 수줍음과 낯가림 보다는 털털하고 시원시원하게 잘 웃는 그런 시원스런 성격의, 그리고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수박을 내 놓으며 1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김택수는 며칠 전 상무 체육관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필자가 소주 자리에서 찾고자 했던 그런 김택수의 ''가 발동 걸리기 시작했다. 와이프가 옆에 있는 자리에서도 은근히 '왕자병' 증세를 보이며 꺼내 놓는 중국의 '극성 (미모의) 여성팬' 이야기에서부터, 카타르의 교민 아줌마들과 골프 라운딩까지 해야 할 정도로 어딜 가나 '탁구 계의 얼굴 마담' 노릇을 해야 한다는 넋두리, 그리고 마루에 진열되어 있는 빈 양주병 3병을 하룻밤에 비워버린 이야기까지… 감히 누가 김택수를 이런 사람이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탁구대 앞에선 물불 가리지 않는 냉철한 'Hitman 김택수' 일런지 몰라도, 사석에서의 김택수는 샤프한 이미지만큼 날렵하고 재치 넘치는 위트를 발휘하는 대단한 재담꾼이었다. 김택수가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동안 김조순은 옆에서 웃음을 멈출 줄 모른다. '신참 부부' 김택수와 김조순이 놀고(?) 있는 모습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즐겁고 좋아보였다.

올 늦가을이면 김택수는 아빠가 된다. 김택수-김조순 커플의 태교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꿈 같은 신혼살림집에서 1년에 6개월도 채 못 사는 김택수가 집을 비울 때면, 김조순은 아무리 심심해도 전자파 우글거린다는 인터넷 접속도 삼가고 있다. 비록 임신 5개월 째지만 태아의 발차기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김택수의 경기 비디오를 태교 삼아 시청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집 아이는 뭐가 될는지 더 궁금해 진다. 유전자로만 따지자면 잘못 나와도 '칼 루이스는 기본' 같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탁구 선수도 괜찮을 것 같다는 김택수의 의견에 김조순은 골프 쪽을 지지한다. 김택수는 곧 바로 받아 친다. '애 골프 시킬 돈 되겠냐?'고… '연금 만땅 커플' 맞는지… 아니 그러다가 자식까지 연금 받게 되는 건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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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취지로 조직이 되어도 한국 사람들 여럿 모이기만 하면 결국은 파벌 싸움하고 갈라지는 꼴 보기 싫어서' 일체 스포츠인 모임에 참여하기 싫어하는 김택수-김조순 커플이 유일하게 활동하는 모임이 하나 있다. 바로 OB 스포츠인들이 모여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함께하는 사람들' 이란 봉사 활동이다. 현역 선수의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다른 사람들만큼 왕성한 활동은 못 하고 있지만, 그 모임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김택수의 지론 덕택에 골프면 골프, 바둑이면 바둑, 김택수는 못 하는 게 없다. 골프 실력도 싱글 수준이라고 하니 프로 선수처럼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탁구 선수 김택수가 이런 만능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 이었는지 그 누가 알았을까? 김택수의 인간적인 측면은 분명 일대 '발견'이었다. 어찌 보면 김택수는 실속파 중에 실속파이기도 하다.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여느 프로 선수처럼 빚을 내어 외제차를 끌고 다니지 않아도 김택수는 챙길 것 다 챙겨가며 인생을 enjoy 하고 있다. 남 부럽지 않은 삶이다. 5살 연하 이쁜이 와이프에게 '2006년 아테네'를 강조하며 '올림픽 금메달 한()풀이'를 다짐하는 김택수의 모습을 보며 필자는 미소를 머금는다.



Epilogue

후추 명전을 한번씩 쓰는 동안 필자 역시 '선정 기준'에 대한 판단이 가물가물해 질 때가 있다. '과연 내가 옳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하고 말이다. 김택수의 경우는 달랐다. 열흘 가까이 그를 지켜보고 그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고 그의 경기 장면을 분석하면서 '김택수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택수 같은 국제적인 보배를 아직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직접 가서 응원해 주고 파이팅을 외쳐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김택수는 오늘도 한국 탁구의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내년쯤이면 은퇴를 하지 않을까 싶은 필자의 예측을 "아테네까지 해야죠." 라는 한마디로 일축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년에 큰 부상을 입어서 본의와는 달리 은퇴를 할지도 모르지만, '금메달을 못 따더라도'란 무언의 전제가 더더욱 대견(?)하다. 그래 맞다. 탁구란 종목이 '메달권 효자 종목'이 더 이상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도 나이든 노장 선수가 순수히 그 스포츠를 enjoy 하는 차원에서 라켓을 계속 잡는다는 사실이 든든하다.
몇일 전 어느 골프대회에서도 김택수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Eagle을 칠 정도로 그의 골프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국제 대회에서 비추어지는 김택수의 모습과 유니폼을 벗은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삶을 즐기면서 살 줄 아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여유 있고 정감 있고 사근사근한 김택수를 보면서'과연 어떻게 저런 사람이 그토록 무서운 승부욕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든다.서른 두 살짜리 '노장 선수' 김택수가 탁구에 있어서 더 이상의 목표는 없다고 얘기할 지 몰라도 필자는 느낄 수 있다. 김택수의 탁구 시나리오 속엔 '마지막 랠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마지막 반격'이 남아 있다는 것을…

현역 초반 유남규의 그늘에 가려 아직까지도 '2인자'의 누명을 쓰고 있는 김택수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남자 탁구의 1인자임을 후추가 나서서 공표하려고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닐지언정, 세계선수권 우승자가 아닐지언정, 후추는 김택수의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라켓을 휘둘러 왔지만 그의 모습을 가까이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탁구사를 장식해 온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쳐두고 후추는 자랑스럽게 '현역 김택수'를 불러낸다. 그가 은퇴한 후에나 인정하고 박수 쳐 주는 그런 팬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김택수의마지막 랠리' 지켜보며 그를 향한 '주먹 불끈'을 보내주고 싶다.

Posted by 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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